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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각

너무도 사랑하는 나의 영창 피아노를 보내며... 영창 피아노에 대한 추억 (feat. 대낮에 한이별)

by 아기냥 202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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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십 년을 함께 한 내 영창 피아노를 멀리 보냈다.

끝까지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동안은 운이 좋게도 큰 평수의 콘도나 2층 주택에 살았지만, 곧 몇 주 안에 15평도 되지 않는 손바닥만 한 작은 콘도로 이사를 가야 하는 입장에서, 커다란 피아노를 가져가는 건 당연히 무리였다.

그렇다고 엄마께 이 피아노를 보낼 수도 없고, 새로 태어난 아기 때문에 안 그래도 정신없는 언니네에 보낼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선택권은 시댁의 뒤뜰에 딸려있는 커다란 헛간에 옮겨놓는 방법이었지만... 

피아노는 습도와 온도에도 큰 영향을 받는 굉장히 섬세한 악기이기 때문에 절대 야외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아버님 댁 밖 마당의 커다란 헛간 구석에 위치한 채 기약 없이 변덕스러운 날씨와 해충들을 견디며 천천히 망가져가고 썩어가느니,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연주되는 삶을 사는 게 내 피아노에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큰 결심을 하고 피아노를 양도한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나에게는 너무 큰 의미인 피아노에 도저히 가격을 매길 수 없어 결국 거의 무료로 양도하다시피 한다고 썼다. 대신 이 피아노가 꼭 필요한, 내 피아노에게 새로운 따뜻한 집을 제공해 주고 오랜 시간 동안 소중히 대해 줄 사람만 연락하라고 글을 덧붙였다.  

글을 올린 뒤 반나절도 되지 않아 바로 연락을 해온 백인 할머니가 계셨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에 할머니의 프로필 사진을 확인하자 귀여운 손녀들 세명과 함께 찍은 따뜻한 느낌의 셀카였다.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할머니께서 피아노를 한번 직접 볼 수 있겠냐고 하셔서 그러라고 했다. 

다음날 할머니께서 찾아오셔서 테스트 연주를 해보시고, 만족하셨는지 내 피아노를 꼭 자신이 가져가고 싶다고 하셨다.

할머니께 피아노를 원래 치시냐고 여쭈어보았다.

한때는 열심히 치셨지만, 남편이 파킨슨 병을 오래 앓으셔서 병시중을 하시느라 그동안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을 위해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고 싶다고... 그리고 마침 행운처럼 발견한 것이 내 피아노 양도 글이었다고. 

연식은 오래되었지만 상태가 완벽하고 외관 역시 아직도 깨끗한 좋은 피아노를 거의 무료로 양도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글을 올리자마자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결국 나는 이 할머니께 피아노를 보내기로 했다.

그래도 정말 진심으로 내 피아노를 아껴 줄 사람이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킨슨 병에 걸리신 할아버지를 오랫동안 돌보셔야 했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자, 무언가 보상을 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내 피아노가 된다면 좋은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피아노를 치시면서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할머니께서 보내신 인부들이 도착해 피아노를 집에서 꺼내 트럭에 실어가는데, 하늘은 또 왜 이렇게 파랗고 햇살은 또 왜 그렇게 좋은지...

내가 한 때 많이 듣던 곡인 박진영과 민선예의 곡, "대낮에 한 이별"의 가사가 생각났다. 

 

햇살이 밝아서... 햇살이 아주 따뜻해서... 

눈물이 말랐어... 생각보다 아주 빨리.

 

햇살이 밝아서, 아픔을 잊을 수 있었어.

햇살이 밝아서, 눈물을 멈출 수 있었어.

햇살이 밝아서, 하늘이 너무 고마웠어. 

햇살이 밝아서 괜찮았어...

 

참나...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정말이지 스스로도 믿기 힘든 수준의 감정이었다. 참, 사람도 아닌 악기를 상대로 내가 이렇게까지 가슴이 아플 줄이야. 그래도 요 며칠간 미리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런지, 정작 그 이별의 순간에는 걱정했던 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는 다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지만. 아, 진짜 피아노 하나로 이 정도로 내 감정이 요동치는 게 너무 웃긴데, 또 정말 안 웃기고 슬프다.

 

하지만 그만큼 나에겐 너무도 특별한 피아노였고, 추억이 정말 많은 피아노였다.

내가 약 7살 경 엄마께서 처음 사주신 피아노로, 그 후로부터 내가 완연한 성인이 될 때까지 수많은 이사를 다녔지만 언제나 나와 함께 한 피아노였다. 무려 한국에서 외국으로 물 건너오면서까지도 일부러 데려온 녀석이었다. 

엄마께서 어린 나와 언니에게 피아노를 사주셨던 이유는 간단했다. 엄마께서 어릴 때부터 항상 피아노를 배우고 싶으셨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대신 당신의 딸들에게라도 피아노를 선물해 주시고 싶으셨던 것이다. 

부모님께 피아노를 선물 받았을 때에, 내가 처음으로 연주하고 싶은 곡은 "Beauty and the Beast (미녀와 야수 테마곡)"이었다. 

5살 경 미국에서 잠시 지낼 때에, 비디오로 본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의 OST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부모님과 근처 서점을 찾아가 <을지 악보>에서 500원에 낱개로 파는 노란색 <미녀와 야수> 악보를 사서, 막연히 피아노 선생님을 찾아서 그 곡을 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악보 역시 아직도 가지고 있다.).

피아노를 단 한 번도 쳐보지 않았고, 바이엘조차 시작하지 않은 고사리 손을 가진 7살짜리의 어리디 어린 꼬맹이가 갑자기 막연히 수준급의 악보를 들고 와 <미녀와 야수>를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하자 선생님께서는 당연히 아직은 그 곡을 칠 수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 그 곡을 처음으로 치겠다고 완곡히 끝끝내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결국 바이엘도 시작하기 전에 이 곡을 완주할 수 있게 되었었다. 말이 안 된다고? 말이 된다. 내가 했으니까.

사실 지금 생각해도, 고집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 정말 굉장한 의지가 아니었다 싶다.

 

그 밖에도 이 피아노에 여러 가지 얽힌 추억들이 있는데... 생각나는 걸 하나 더 말해보자면 지금으로부터 약 15년도 더 전, 유튜브가 막 생겼었던 나의 10대 시절 일본의 유명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모 인물의 피아노곡을 연주해서 심심풀이로 업로드했었는데, 그 인물이 자신의 개인 블로그에 내 연주 영상을 직접 올려 갑자기 내 연주 영상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적도 있다. 

 

이후에도 이 피아노로 정말 많은 곡들을 연습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워낙 좋아해서 거기에서 전지현이 연주했었던 캐논도 정말 많이 쳤었고...  베토벤의 <비창>을 치는 걸 좋아했고... 타이타닉 OST, 라라 랜드 OST, 시네마 천국 OST 등 수많은 영화 테마곡들을 피아노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었다.

악보를 구할 수 없으면 연주하고 싶은 노래를 계속 반복해서 들어서 음을 직접 따서 악보를 완성하기도 했었고... 마스터하고 싶은 곡이 생기면 엄청나게 몰두해 버려서 밥도 안 먹고 몇 시간이고 연습을 하기도 했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스스로도 많은 위로를 받았고, 참 행복했었다. 

 

이별이 결정되고 며칠 동안 피아노만 바라보면 눈물이 수도꼭지처럼 주르륵 흘렀다.

잠들려고 침대에 누우면 보내야만 하는 피아노 생각이 또 나면서 눈물이 터져 펑펑 울다 잠에 들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 혹은 가까운 가족과 강제로 생이별을 해야 하는 듯한 가슴의 고통을 겪으며 눈물이 끊이질 않았다. 

나도 내가 이 정도로 내 피아노를 소중히 여기는지 몰랐다.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함께 해왔으니, 그동안 말 그대로 나의 일부분과 다름이 없어서 항상 내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곧 영영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천갈레 만갈레 쩍쩍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너도 나도 미니멀리즘을 외치는 21세기이지만, 나는... 항상 나의 추억들과는 이별하고 싶지 않다.

특히 내 피아노는 그 누구에게도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겠다는 다짐을 갑자기 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세상에 피아노는 많고 나중에라도 경제적 조건이 된다면 더 좋은 피아노를 사면 될 일이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장미들이 있어도, 어린 왕자에게는 오직 자신에게 의미 있는 한 송이의 장미만이 소중했듯이... 

나에게 의미 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대체를 할 수가 없다.

 

수십 년 전 내가 어렸을 때에 엄마께서 일부러 강남에서 맞춤으로 제작해 오셨던 새하얀 피아노 커버를 조심스레 벗겨내자, 아직도 보호 필름이 벗겨지지 않은 피아노 뚜껑이 드러났고 그걸 보게 되자 한참을 또 엉엉 울었다. 부모님께 선물 받은 지 20년이 넘어가는 피아노지만, 아직도 건반을 누르면 맑고 고운 소리를 낼만큼 정기적으로 튜닝을 하고, 생활 흠집이 거의 없을 만큼 소중하게 관리했었던 피아노였다. 

피아노 몸통을 조심스레 두 팔로 끌어안고 피아노의 뚜껑에 가만히 머리를 기댄 채 마음으로 피아노에게 가만히 말해 주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네가 그동안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해 줬었는지 몰라. 더 이상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너를 데려갈 수 있는 큰 집에 이사 갈 수 있을 만큼 더 치열하게 노력했어야 하는데, 내가 못나서 너를 여기에서 이렇게 보내. 하지만 앞으로도 행복하기를 바랄게. 이게 내가 너한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최선이야. 

 

이제 나와는 영영 이별이지만, 그래도 북미 시골 어딘가에 위치한 커다랗고 따뜻한 집에서 다정한 할머니 곁에서 그렇게 오래오래 연주되면서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고마워... 고맙고 사랑해. 꼭 잘 지내야만 해..."

 

마지막으로 벚꽃 그림이 그려져 있는 분홍색 편지지에 할머니께 편지를 간단하게 썼다. 

 

"안녕하세요, 이 피아노의 전 주인 XXX입니다. 이제 이 피아노는 할머니 거예요.

이 피아노는 저에게 정말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소중한 기억을 준 피아노입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께서도 이 피아노와 그런 소중한 추억을 많이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부디 피아노를 소중히 대해 주시고, 잘 관리해 주시기를 바랄게요. 피아노를 새로운 집에 따뜻하게 맞이하여 주세요..."

 

편지를 쓴 뒤에는 피아노로 <Beauty and the Beast>를 마지막으로 연주했다.

내가 내 피아노로 가장 처음으로 연주했었던 곡이 이 곡이니, 마지막 역시 이 곡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곡의 마지막 노트를 연주한 뒤 건반들을 하나씩 손끝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이후에는 편지를 가만히 피아노 건반 위에 올려 둔 뒤, 조용히 뚜껑을 닫았다. 

 

오랜 시간 동안 너무 사랑받은 물건은 정령이 깃든다는 말이 있는데, 내 피아노 역시 그럴까?

만화 <원피스>에서 보면 루피 해적단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고잉 메리호의 정령이 이별의 순간에 나타나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내 피아노 역시 마지막 순간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어딘가에서... 계속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넘치게 사랑받고, 행복하기를.

진짜 너무 보고 싶을 거야. 

 

고마웠어, 나의 피아노.

 

2022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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